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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적이었던 초강대국 소련 ==
== 미국의 적이었던 초강대국 소련 ==
<pre>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Workers of the world, unite!
Proletaires de tous les pays, unissez-vous!
Proletarier aller Länder, vereinigt euch!
Пролетарии всех стран, соединяйтесь!</pre>
반공주의 자본주의자가 만들었지만 객관을 추구하는 유저다보니 객관적인 비판은 있어도 주관적으로 까대진 않을것이다.
=== 개요 ===
=== 개요 ===
소련이란,''' '블라디미르 일리크 레닌''''이라는 공산주의자가 세운 나라이다. <br>
블라디미르 레닌<ref>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ref>가<br>
1917년 10월 혁명으로 건국한 공산주의, 사회주의 국가<ref>1917 ~ 1922 </ref>
미국과 함께 공식적인 '''초강대국'''으로 분류되었을 정도로 엄청나게 성장했다.
=== 상세 ===
=== 역사 ===
'''"이제 차르는 없다. 하느님도 없다!"'''<br>
==== 역사 ====
순수한 러시아민중은 인자하신 아버지 차르가 자신들을 안아주실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차르의 대답은 냉혹한 총칼이었으니...'''<br>
때는 바야흐로 제 1차 세계대전 때, 러시아 제국은 계속된 전쟁으로 농민들이 무척 지쳐 있었다. <br>
시대는 1905년 1월 22일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자 농민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치를 즐기고 자빠진 차르(카이사르의 러시아 이름으로 동유럽 등 슬라브 문화권에서 황제를 뜻함)에 대한 원망이 커져갔다. <br>
러시아 제국에서는 부패한 귀족층과 보이지 않는 개혁. 그리고 1년간 지속된 전쟁으로<br>
그때 레닌이 '''카를 마르크스'''란 독일인의 사상에 찬성하여 이것을 이념으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세우기로 했다. <br>
노동차와 농민들은 빈곤했고 결국. 로마노프 왕조의 러시아 제국에선<br>
결국 농민들은 당시 차르이던 '''니콜라이 2세'''를 몰아내기 위해 힘을 합쳤고, 이에 군인들까지 합세한다. <br>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한다.<br>
니콜라이는 처음엔 <s>누구 좋으라고</s> 동생인 미하일 대공에게 황제 자리를 넘겨주려 하였지만, 실패하고 소련이 세워진다. <br>
==== 피의 일요일 사건 ====
그리고 그와 함께 소련은 징글징글한 세계대전에서 빠진다. 임시정부 파트는 복잡하니까 나중에. <br>
피의 일요일 사건(Крова́вое воскресе́нье)은 1905년 1월 22일 러시아 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생한 유혈사태이고,<br>
그후 레닌은 그토록 바라던 사회주의 국가에서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다. <br>
이 사건으로 인해 러시아 차르는 두마(의회)를 설치하게 된다.<br>
'''그러나....'''
<br>
{{스포일러}}
'''발단'''
'''레닌은 공산주의 독재를 펼쳤다!''' <br>

나머지는 내일마저 작성할게요
농업국가였던 러시아 제국은 크림 전쟁에서의 처참한 패전 이후 자국의 뒤처진 현실을 파악하고 근대화의 필요성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근대화와 동시에 러시아의 빈약한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필요한 노동력이 부족했다. 차르 알렉산드르 2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1861년에 농노 해방령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농지에서 '해방된' 농민들은 터무니없이 높은 액수의 돈을 토지상환금 명목으로 국가에 납부해야 했고, 이는 상당 부분 농노들을 해방시킨 귀족에게 돌아갔다. 결국 러시아의 농노 해방은 농노들을 봉건적 종속에서 해방시킨 대신 과중한 경제적 종속으로 묶어 놓는 정책인 셈이었다.[2]

당시 러시아 농민 공동체는 가족이 많을수록 땅을 더 많이 분배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출산율이 폭증하기 시작했고 결국 다수의 농민들은 농토가 부족해지자 농업을 포기하고 도시로 몰려가서 저임금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과도한 토지상환금과 인구 폭증으로 농촌에는 기근이 만연하게 되었으며, 반강제적으로 도시로 가게 된 농민 출신 노동자들도 저임금과 향수병, 과도한 노동 시간으로 고통을 받게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제국 정부는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세르게이 비테 주도의 공업화와 철도 건설 자본을 얻기 위해 과격한 수출장려 정책을 펼쳤다. 이로 인해 러시아 국내에서 생산되고, 국민들이 먹어야 할 농산물들마저 외부로 유출되면서 물가가 폭등하였다. 이런 비인간적인 수출 정책은 기근 중에도 계속되어서 민중의 고통을 더 심각하게 만들었다.<br>
다음날에 예정

2021년 11월 26일 (금) 18:05 판

엔트리의 유저 소련

스태프 선정 ?개
인기작품 ?개
팔로워 약 400명

'소련'이란 엔트리에서 활동중인 유저중 한명이다.
2021년 1월에 활동을 시작했다.
맨날 "헤으응"거린다.
공산당은 좋아하지 않는다. 컨셉이다.

미국의 적이었던 초강대국 소련

개요

블라디미르 레닌[1]
1917년 10월 혁명으로 건국한 공산주의, 사회주의 국가[2]

역사

"이제 차르는 없다. 하느님도 없다!"
순수한 러시아민중은 인자하신 아버지 차르가 자신들을 안아주실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차르의 대답은 냉혹한 총칼이었으니...

시대는 1905년 1월 22일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부패한 귀족층과 보이지 않는 개혁. 그리고 1년간 지속된 전쟁으로
노동차와 농민들은 빈곤했고 결국. 로마노프 왕조의 러시아 제국에선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한다.

피의 일요일 사건

피의 일요일 사건(Крова́вое воскресе́нье)은 1905년 1월 22일 러시아 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생한 유혈사태이고,
이 사건으로 인해 러시아 차르는 두마(의회)를 설치하게 된다.

발단

농업국가였던 러시아 제국은 크림 전쟁에서의 처참한 패전 이후 자국의 뒤처진 현실을 파악하고 근대화의 필요성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근대화와 동시에 러시아의 빈약한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필요한 노동력이 부족했다. 차르 알렉산드르 2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1861년에 농노 해방령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농지에서 '해방된' 농민들은 터무니없이 높은 액수의 돈을 토지상환금 명목으로 국가에 납부해야 했고, 이는 상당 부분 농노들을 해방시킨 귀족에게 돌아갔다. 결국 러시아의 농노 해방은 농노들을 봉건적 종속에서 해방시킨 대신 과중한 경제적 종속으로 묶어 놓는 정책인 셈이었다.[2]

당시 러시아 농민 공동체는 가족이 많을수록 땅을 더 많이 분배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출산율이 폭증하기 시작했고 결국 다수의 농민들은 농토가 부족해지자 농업을 포기하고 도시로 몰려가서 저임금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과도한 토지상환금과 인구 폭증으로 농촌에는 기근이 만연하게 되었으며, 반강제적으로 도시로 가게 된 농민 출신 노동자들도 저임금과 향수병, 과도한 노동 시간으로 고통을 받게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제국 정부는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세르게이 비테 주도의 공업화와 철도 건설 자본을 얻기 위해 과격한 수출장려 정책을 펼쳤다. 이로 인해 러시아 국내에서 생산되고, 국민들이 먹어야 할 농산물들마저 외부로 유출되면서 물가가 폭등하였다. 이런 비인간적인 수출 정책은 기근 중에도 계속되어서 민중의 고통을 더 심각하게 만들었다.
다음날에 예정

  1.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2. 1917 ~ 1922